인류가 농경이란 생활양식을 발달시키기 훨씬 이전부터 씨앗은 지구의 대지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살아 왔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또 다른 생명이 그에 의존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씨앗에 응축되어 있다.
인류는 농민이 되면서 그 힘을 이용해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초기의 농민들은 자연의 돌연변이와 교잡 등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작물 품종을 육종하며 가짓수를 늘려 나갔다.
그런 맥락에서 농민은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한 농민에게서 다른 농민에게로,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자연스럽게 씨앗을 전하고 나누며 그 성과를 공유했다.
씨앗은 단지 먹을거리로만 취급되지 않았다. 소중한 식량자원이면서, 동시에 문화유산이기 도 했다.
씨앗과 관련된 우리의 언어, 풍속 등을 포함하는 전통지식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씨앗의 다양성이 문화의 다양성과 맞물려 있는 한편, 자연과 맞닿아 있었다.
인류는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상황은 급속히 달라졌다.
20세기 산업 문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씨앗이 사라지게 되었다.
생산성과 균질성이란 인류 최대의 과제의 달성에 몰두한 나머지 그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수많 은 작물과 가축의 품종을 도외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 는 20세기, 전체 작물과 가축 품종의 75%가 절멸되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작물과 가축의 품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생산성을 최고로 삼는 근대적 농법은 다양한 씨앗의 절멸을 더욱 촉진시켰다.
자연의 방식을 모방하거나 활용하던 농법에 길들여졌던 씨앗은 이제 농약과 비료라는 근대의 화학 농자재를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지며 녹색혁명의 씨앗으로 탈바꿈 되었다.
씨앗은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인위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씨앗과 연관되어 있던 문화 또 한 절멸되어 버리며, 씨앗은 더 이상 문화유산이 아닌 사고파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절멸될 위기에 처한 씨앗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 씨앗들을 지키고 전하며 나아가고자 한다.
단순히 지키고 전하 는 일만이 아니라, 과거 농민들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품종을 찾아가는 육종가가 될 것이다.
또한 씨앗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화학 농자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자연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른 여러 생명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시도하려 한다.
그뿐만 아니라, 씨앗에 대한 권리를 씨앗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고 지구의 대지에 뿌리를 내린 씨앗과 직접 대면하는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다시 한번 이웃에서 이웃으로, 현세대에서 미래세대에게로 씨앗이 널리 퍼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생산성과 균질성이란 가치에만 매몰되지 않고 씨앗을 중심으로 사회 곳곳에 다양성의 꽃이 활짝 피도록 씨앗을 심을 것이다.
이를 실천하고자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모든 이의 지혜와 힘을 모아, 우리는 씨앗과 함께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