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과 농사, 때로는 그와 연관된 농부와 농업 이야기를 한 알씩 씨나락 까먹듯이 가볍고도 재미나게 다룹니다.
2025.10.20

사진 출처 happy.designhouse
저는 한때 고추를 씨앗으로 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 고추를 씨로 심어 볼까 생각한 것은 귀찮아서 그랬습니다. 모종을 어디서 구해다 심기도 그렇고, 나중에 버팀대를 꽂고 줄을 매는 일도 너무너무 귀찮아서, 한 마디로 게을러서 씨로 심을 생각을 했지요.
굳이 더 그럴싸한 핑계를 대자면, 버팀대도 그렇고 줄도 그렇고 이건 썩는 것도 아니니 나중에 처리하는 문제가 골치아팠습니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고추 곧뿌림은 초기에만 열심히 김을 매주면 나중에는 편하더군요.
하지만 고추를 씨앗으로 직접 심는 일은 밭의 규모가 작을 때나 추천할 만하지, 수확량이 많이 필요하다면 힘들 겁니다. 그래도 수확량을 따지지 않는다면, 투입하는 기운이나 비용에 비하면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하긴 합니다. 특히 고추라는 식물의 고유의 특성을 알아보자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씨앗을 심는 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주로 4월 곡우 무렵에 심었습니다. 고추는 더운 나라가 고향이라 서리를 맞으면 좋지 않기에 늦서리를 피하려고 그때를 택했습니다. 곡우 무렵 심으면, 보통 스무날에서 한 달쯤 지나야 싹이 트니, 양력으로 5월 중순 이후가 되어서 서리 걱정은 없습니다.
고추는 흙 속에서 달이 한 바퀴쯤 돌아야 싹이 납니다. 이걸 두고 옛날에 만났던 동광원 원장님은 “고추는 매운물이 빠져야 싹이 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참 감칠맛나지요?
잠깐 딴 길로 새서, 고추씨를 받으려면 보통 맏물 바로 그 다음 것이 좋습니다. 형만한 아우가 없는 것일까요? 맏물도 괜찮기는 한데, 그 다음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고추씨를 받으려면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피해야 할 것은 끝물입니다. 끝물은 어떠한 작물이든지, 씨로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심는 방법은 처음에는 줄뿌림을 했습니다. 그런데 관리하기가 참 힘들더군요.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곧뿌림할 때는 초기에 풀을 잡아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나 5월이면 온갖 풀들이 싹을 내서 자랄 때라 더 그렇습니다. 그때 제대로 풀을 잡지 않으면 고추가 풀애 치여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새로 선택한 방법은 점뿌림입니다. 점뿌림할 때는 심을 부분의 흙을 살짝 걷어내고, 한 번에 팍 넣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간격으로 띄엄띄엄 뿌립니다. 저는 그렇게 한 구멍에 보통 10알씩 넣었습니다. 그러고나서 흙을 살짝 덮습니다. 더 좋은 것은 잘 삭은 두엄을 살짝 덮어주는 것입니다.
관리는 계속 강조하지만 초기에 풀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때만 잘 돌보면 이후에는 큰 걱정은 없습니다. 태풍이 몰아치지 않는 이상 잘 쓰러지지도 않고, 바람이 세게 불더라도 주렁주렁 고추가 달려 있지 않으면 그대로 서서 버팁니다. 대신 비가 많이 와 땅이 물렁거리면 스르륵 기울어지기는 합니다. 그럴 때는 그냥 제대로 세운 다음 발로 한 번 꾹 밟아주면 다시 일어섭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입니다. 고추는 병 앞에서 장사 없더군요. 한동안 풋마름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찾아보니 계속 고추만 심는 하우스나 질소질이 많으면 발생한다고 하네요. 노지에서도 드문드문 걸리구요. 제가 거름을 별로 주지 않으니 질소질 때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이어짓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풋마름병 말고도 세균성 점무늬병이라든지, 탄저병, 돌림병, 흰가루병, 입고병, 모자이크병, 겹둥근무늬병, 젖곰팡이병 등등..... 고추에는 뭔 병이 이렇게 많은 걸까요? 아마 이거 말고도 더 있을 겁니다.
벌레는 진딧물은 없었지만, 담배나방은 생기더군요. 그 매운 고추를 어찌나 잘 먹던지 그게 더 신기했습니다.
좌우당간 고추를 씨로 심으면 가장 좋은 건, 역시나 버팀대 박기와 줄 매기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편하긴 하더군요.
고추의 자람새는 모종으로 심은 것보다는 느립니다. 모종으로 5월 초에 옮겨심은 게 자리를 잡을 무렵, 곧뿌림한 것은 막 싹이 트게 됩니다. 그만큼 차이가 있지만, 이것도 잠시입니다. 씨로 심은 것들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자라면, 오히려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무섭게 자랍니다. 그럴 때 비라도 한 번 내려 주시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렇게 고추가 손가락 하나 정도 자라면 1차로 솎아 줍니다. 잘 자란 것 3~4개만 남기고 솎아 줍니다. 그렇게 솎은 것은 그냥 나물로 먹어도 됩니다.
다음에는 한 뼘 정도 자라면 한 그루에 튼실한 것 한 포기만 남기고 솎으면 됩니다. 그때 솎은 것들을 보면, 곧뿌리가 쭉 뻗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모종한 것과 비교하려고 뽑아보니, 모종은 옆으로 잔뿌리만 많이 뻗었더군요. 반면, 씨로 심은 것들은 길쭉한 뿌리가 쭉쭉 뻗어 있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이러한 뿌리의 차이가 이후 고추가 자라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모종과 곧뿌림의 가장 큰 차이는 이렇게 뿌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쭉 뻗은 곧뿌리를 내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위로 얼마나 자랄지, 열매를 얼마나 맺을지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곧뿌리를 내린 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알아서 자라고, 알아서 열매를 맺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반면, 모종으로 심은 것은 사람이 거름을 주는 대로 잔뿌리로 쪽쪽 빨아먹으며 위로 쑥쑥 자라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냥 막 자라는 건 아닐지. 아무튼 모종을 옮겨심으려고 몇 번 옮기면서 곧뿌리를 끊는 것이 잔뿌리가 무성하게 하는 원인인 듯합니다.
농사에는 정답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하곤 합니다. 어떤 방법이 더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제가 편하고 좋아서 고추를 씨앗으로 직접 심는 법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그 대상도 그 사람을 따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심은 것들은 저를 닮아서 그런지 늦게 싹이 나고 더디게 자라더군요.
뱀다리. 유튜브라는 곳은 참 재미나군요. 이제는 이런 영상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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